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실리오스 2세 (문단 편집) === 스클리로스 내전 === 976년 1월 10일 공동 [[바실레우스|황제]] [[요안니스 1세|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]]가 사망하자 바실리오스 2세는 사실상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했다. 하지만 이 당시 바실리오스는 고작 18살의 정치경험 부족한 풋내기에 불과했다. 황제는 자신의 친척이자 시종장(παρακοιμώμενος, Parakoimomenos)인 [[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]](Βασίλειος Λεκαπηνός)[*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[[로마노스 1세|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]]의 사생아로,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 [[콘스탄티노스 7세]]와는 처남 관계였다. 바실리오스 2세 입장에서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아버지의 외삼촌 즉 진외종조부였다.]의 후견으로 착실히 국정 경험을 쌓았다. 실권을 장악한 레카피노스는 이 어린 황제를 얕잡아보며 조종하려 들었다. 이에 황제는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군말없이 따르며 행정과 군사를 익혔다. 바실리오스 2세의 집권 초반부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. 두 전임 [[바실레우스|황제]]([[니키포로스 2세]], [[요안니스 1세]])는 모두 무력으로 즉위한(심지어 한 명은 전임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한) 장군 출신 황제였다. 이로 인해 바실리오스 2세의 정통성은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었고, 제국의 귀족들은 앞의 두 사람처럼 [[바실레우스|황제]]가 되고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. 반란의 중심에는 [[요안니스 1세]]의 처남인 '''[[바르다스 스클리로스]](Βάρδας Σκληρός)'''와 [[니키포로스 2세]]의 조카인 '''바르다스 포카스(Βάρδας Φωκᾶς)'''가 있었다.[* 두 사람 모두 군에서 각자의 유력한 지위를 활용하여 당대 제국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. 이 두 사람의 반란은 멜리시노스 가문, 코르티키오스 가문, 타로니티스 가문 등 소아시아 지역 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.]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지 몇 달 후인 976년의 봄,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스스로 [[바실레우스|황제]]임을 선언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. 반란은 격렬했다. 977년에는 [[니케아]]가 반군 손에 넘어갔고, 수도인 [[콘스탄티노폴리스]] 또한 반군에게 공격받았다. 이에 레카피노스는 '''[[바르다스 포카스]]'''를 유배지 히오스 섬에서 소환, 군권을 부여해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. 비록 충성심은 의심스러웠으나 바르다스 포카스가 요안니스 일가에게 확실한 반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.[* 일찍이 바르다스 포카스는 971년에 [[요안니스 1세]]에게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이 일가를 싫어했다.] 라이벌 제거가 목적인지 단순한 반감 때문인지는 불명확하지만, 어쨌거나 포카스는 적극적으로 바실리우스의 요구에 협조하여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을 진압했다. 979년 스클리로스가 [[바그다드]]로 도주하면서 반란은 종식된 듯 보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